챕터2. 내선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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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전시장에 위치한 <POEM> 상설 전시장… 여깁니다.”

당신은 경비원 겸 정원사를 따라 불 꺼진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당신이 전시장을 둘러보는 사이 정원사는 뚜벅뚜벅 걸어가 벽면의 패널을 열고 레버를 내린다.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책장이 옆으로 움직여 그 뒤에 있던 문을 드러낸다.

“이건 기차…문이네요?”

“그렇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곧 옵니다.”

“뭐가 온다는-“

당신이 질문하려는 찰나, 경적 소리가 들리더니 아무 것도 없었던 문 바깥으로 붉은 빛을 흩뿌리는 열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어두웠던 전시장도 열차의 빛에 샛노랗게 물든다.

“자, 타세요. 그러다 놓칩니다.”

“잠시만요-“

정원사는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열린 문으로 밀어 넣고 한 걸음 물러난다. 당신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멍하게 있다가 문이 닫히는 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다.

“아무 설명도 없이 이게 무슨-“

하지만 정원사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전시장을 떠나고, 당신이 탄 기차는 정류장을 떠나 선로를 따라 움직인다.


당신은 창 밖을 쳐다본다. 기차는 순환선인 듯 원형의 선로를 따라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원 안쪽에는 재가 날리는 불타는 도시가 있다.

“그러다 턱 빠지겠어?”

낯선 목소리에 당신은 뒤를 돌아본다. 탑승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노숙자가 히죽 웃고 있다. 옷은 꼬질꼬질하지만 달빛을 머금은 듯한 흰 머리가 인상적이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 난 그냥.. 내릴 역을 놓쳐버린 아무개지.”

“역을 놓쳤다고요?”

“그래. 이 기차는 재가 날리는 중앙 도시를 빙글빙글 도는 내선 순환이야. 그리고 나는 3000번이 넘게 같은 곳을 돌고 있지. 역을 놓쳐서 말이야.”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니까 여기 있겠지. 뭐… 사실 내리고 싶었다면 내렸을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 보통 사람들은 그걸 안 내렸다고 합니다.”

“흐으, 자네는 외선순환에서 온 지 얼마 안돼서 모르는 거야.”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자네, 공감을 할 줄 모르는군. T야?”

“…T는 맞습니다.”

“흐흐. 자네가 그렇게 답답해하는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주겠네.”

“자원봉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이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야. 자네, 여기서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지 않나?”

“…”

“자네가 날 도와주면 나도 자네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겠네. 아마 간절히 필요할 거야.”

“… 그게 뭡니까?”

“어허, 선물은 모르는 채로 뜯어봐야 재밌다는 걸 모르나? 어르신이 어련히 잘 줄까.”

“…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 뭘 해야하죠?”

“내가 내려야 하는 역에 도착하면, 날 정류장으로 내보내 주게.”

“그건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요. 직접 걸어 나가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맞아. 맞는데, 자네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걸세.”

“알겠습니다. 역 이름을 알려주시죠.”

당신은 노숙자에게서 역 이름을 듣고 자리에 앉는다. 어느새 밖은 흩날리는 재로 인해 회색빛이다.

‘도대체 이 곳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꿈.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건 현실이야. 그 증거로 잠시 눈 좀 붙일테니 목적지에 도착하면 깨워주게.”

곧 노숙자는 의자 세 칸에 누워 새우잠을 자기 시작한다. 당신은 뒤늦게 그가 당신이 속으로 했던 생각을 읽었음을 깨닫지만, 그가 경이로운 속도로 잠에 빠졌기에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다음 역은 OO역, OO역입니다. 나가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역이 몇 개 지나가고, 드디어 다음 역이 노숙자가 나가기로 한 정류장이다. 당신은 잠을 자는 노숙자를 흔들어 깨운다. 하지만 노숙자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르신, 이제 일어나시죠.”

“어르신?”

“쿨쿨”

“깨어나신 것 다 압니다. 내리셔야죠.”

“…”

“어르신?”

“…”

어느새 노인은 두 눈을 떴지만, 막상 일어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그의 태도 변화에 의아해하면서도 친절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안내한다.

“… 안 내릴래”

“네?”

“… 난 안 내려.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하지만 거래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안 내린다 해도! 그렇게 날 내보내고 싶으면 힘으로 밀던가!”

당신은 노인의 태세전환에 당황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거래에 따라 강제로라도 정거장에 내리게 해야 할까? 아니면 노인의 의사를 존중해 내버려 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