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9] 의외의 조합이 주는 매력, 로미오+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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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줄리엣 리뷰

*스포일러 포함

의외의 조합

1996년에 개봉한 <로미오+줄리엣>은 세기말 감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배즈 루어먼 감독이 연출한 해당 작품은 20세기의 배경에 16세기의 희곡 대사를 합치는 재미있는 선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각적으로는 세기말 감성의 향연이지만, 대본은 원작에 충실한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왔다.

당연하게도, 미국 관객들 사이에서도 셰익스피어 희곡의 원어 대사를 그대로 차용한 것에 대한 호불호가 있었다. 알아듣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배우가 러닝타임 내내 정철의 <사미인곡> 시구를 대사로 내뱉는 느낌이다. (물론 초기 현대 영어로 쓰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중세국어로 쓰인 사미인곡보단 알아듣기 쉬울 듯하다)

사실 로맨스 장르에서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유명하고 자주 패러디 되는 커플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독과 예술팀의 선택도 이해가 간다. 무언가 특색이 있어야 화제가 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니까. 다만 이 조합은 너무나 의외라서, 보통 <로미오+줄리엣>을 처음 접하게 되면 벙찌거나 폭소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취향에 맞았다. 희곡에서 그대로 가져온 초기 현대 영어가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대사가 영상과 합쳐져 재미있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스타 파워

결과적으로 <로미오+줄리엣>은 흥행에 성공했고, 원작의 영화판을 얘기했을 때 자주 거론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출연도 기여했다. 영화를 안봤더라도 로미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어항을 들여다보다 줄리엣(클레어 데인즈 분)과 눈이 마주치는 장면은 적어도 한 번은 봤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을 얘기할 때 꼭 언급되는 씬으로, 당시 그의 미모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많았다.

매력적인 세기말 감성

또한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영상의 키치함도 한 몫 했다. 몬테규와 캐퓰릿 가문의 청년들이 주유소에서의 총격전을 하는 씬을 살펴보자. 메인빌런인 티볼트 캐퓰릿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온갖 요소들이 혼합되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총격전은 세기말 스타일로 각색된 서부극 혹은 갱스터 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와이안 티셔츠, 바지 체인과 장식된 권총이 화면을 채우고, 그 뒤로는 서부극 음악과 스포츠카 배기음이 흐른다. 그런데 대사는 초기 현대 영어 그대로다. 여러 의미로 눈을 뗄 수 없는 등장씬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걸로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제작진은 등장인물 이름을 자막으로 띄워 만화적인 느낌을 더했다.

촬영 기법도 평범하지 않았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배우들의 표정연기와 반응을 강조하였다. 안 그래도 이미 연기가 과장된 느낌이 있는데, 여기에 한 술 더 뜬 것이다 . 예를 들어, 카메라는 주유소에서 담뱃불을 붙인 뒤 성냥불을 구두굽으로 비벼 끄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티볼트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보여준다. 또한, 몬테규 가문을 증오한다는 대사를 칠 땐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기법으로 잡아 깊은 감정의 골이 있음을 드러낸다.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시선을 확 잡아끄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다재다능한 연출

한편, 영화는 서정적인 장면들도 아름답게 표현해낸다. 햇빛이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골든 아워에 촬영한 로미오의 첫 등장은 탄성을 자아낸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날밤을 보내는 장면도 직접적인 노출보다는 이불로 간접적으로 표현해 천박하지 않고 순수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처럼 한 영화 안에서도 서부극과 멜로를 오가며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해낸 배즈 루어먼 감독의 다재다능함을 확인 할 수 있다.

맺음말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던 영화다. 처음에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대사가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듣다 보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흔치 않은 조합으로 빠져들게 하는 영화, <로미오+줄리엣>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