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5] 따뜻한 추리소설, 웨스팅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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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팅 게임>

저자에 대해

엘렌 라스킨(Ellen Raskin)은 수많은 북 자켓을 디자인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그림 동화, 삽화가, 소설가였다.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웨스팅 게임>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으로 엘렌 라스킨은 1979년 뉴베리 메달을 수상했다.

엘렌 라스킨이 “퍼즐 미스터리”라 지칭한 <웨스팅 게임>은 저자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무려 16명의 주연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임에도 “내용을 다 알고 쓰면 재미없기에” 실시간으로 속임수와 힌트, 해결책을 고안했다고 한다. 저자는 아이들을 위한 책을 쓰려했지만, 이를 위해 글의 수준을 낮추지는 않았다. 가독성에 신경쓰면 아이들도 복잡한 이야기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인이자 편집자였던 앤 듀렐은 이렇게 회고한다. “엘렌은 본인 내면의 아이를 위해 글을 썼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아이들에 내재된 어른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시작

이야기는 미시건 호숫가의 5층 빌딩 ‘선셋 타워즈’가 선별된 인물들에게 임대되며 시작한다. 부동산 중개업자 바니 노스럽은 좋은 시설과 매우 싼 임대료, 넓은 상가 공간을 내세워 하루 만에 여섯 가구와 계약한다. 사실, 이는 제지회사의 오너이자 백만장자인 샘 웨스팅이 주택을 미끼 삼아 등장인물들을 자신이 짠 판 위에 올리려는 계략이었다. 알고 보니 입주자들 전부 웨스팅과 연관된 이들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의 입주가 끝난 후, 샘 웨스팅의 부고가 신문에 실린다. 뒤이어 입주자들에게 샘 웨스팅의 유언장 공개식에 참석해 달라는 편지가 날아온다. 16인의 입주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된 유언장엔 “내 목숨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빼앗겼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이 16인 중에서 본인을 살해한 범인을 지목하는 사람에게 회사와 재산을 물려주겠다 선언한다.

본게임의 규칙

친애하는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적들에게, 지금부터 웨스팅 게임을 시작한다. (책 인용)

유언에 따라 16인의 상속자는 웨스팅이 짝지어준 대로 팀을 이루어 살인범을 찾아내야 한다. 힌트는 단어가 적힌 종이로 인당 2장씩, 팀당 총 4장이 주어진다. 이 힌트들을 한데 모으면 수수께끼의 답에 접근할 수 있다. 목표는 스포츠 경기나 체스 게임 등이 그렇듯, 승리하는 것. 문제는 낯선 팀원을 과연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유언장을 작성한 웨스팅의 의도가 무엇인지이다. 샘 웨스팅이 이 추리 게임을 시작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살인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입주자들은 협력하여 힌트들을 모으고 범인을 특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웨스팅의 비극적인 과거와 입주자들과의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키워드: 포지션

이 작품의 매력은 인물들의 성장 서사에 있다. 입주민들은 웨스팅이 깐 판 위에서 교류하고 성장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바로 입주민들의 ‘포지션 (Position, 직업/ 직책/ 사회적 지위/ 자세)’이다. 16인의 입주민들은 공식적으로 두 번, 유언장 공개일과 범인을 지목하는 날에 모이는데, 이때 본인의 포지션을 적어서 제출해야 한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허세나 좌절감이 묻어나는 포지션을 적었다면, 게임이 끝날 때 즈음에는 각자 맞는 옷을 찾은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성장은 팀원이나 경쟁자들과 교류하며 이루어진다. 본 게임을 진행하면서, 상속자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관찰하며, 때로는 손을 잡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이웃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몇몇은 파트너의 도움으로 다시 꿈을 쫓을 수단도 얻게 된다. 의외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이 웨스팅의 선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엔딩

인물들의 성장 서사에 집중하면서도 저자는 추리 소설의 핵심인 미스터리의 해결과 반전에 충실하다. 소설의 후반부, 드디어 살인자의 정체를 밝히고 게임의 진정한 승자를 가리기 위한 시간이 주어진다. 마지막 퍼즐조각이 자리를 찾고 저자의 큰 그림이 드러날 땐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더 나아가 결말의 따뜻한 감성까지.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지는 쾌감이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미스터리의 짜임새보다 범죄의 선정성에 의존하는 이야기에 질린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2)이나 보드게임 ‘클루'(1949)가 연상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