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4] 한정된 공간, 터질듯한 긴장감: 더 테러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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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 리뷰

*스포일러 포함

때론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 <더 테러 라이브>도 그랬다. 201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방송국 라디오 스튜디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테러범과 협상하는 윤영화 앵커 (하정우 분)의 모습을 집요하게 담아낸다. 한강 다리가 폭발하는 장면이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극 등은 TV 모니터를 거쳐 짧게 송출될 뿐, 한국 신파 영화의 단골인 시민들의 반응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대신 원톱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준다.

원톱 주인공

자칫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동일한 화면의 반복이지만, 하정우 배우는 능글맞으면서도 신경질적인 앵커로 분해 화면을 장악한다. 처음 테러범의 전화가 걸려왔을 땐 장난 전화라고 생각해 욕을 퍼붓다가도, 예고대로 한강 다리가 폭발하자 태세를 전환해 테러범에게 인터뷰하자고 매달리는 이중적인 모습까지.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윤영화 앵커가 그려온 삶의 궤적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문제이지만 윤 앵커는 출세를 위해 경찰 신고를 미루고 테러범과의 협상을 독점할 만큼 이기적인 인물이다.

사회적 계급과 선악구도

흥미롭게도, 영화는 인물들의 사회적 계급이 올라갈수록 더 악독하게 그려낸다. 윤영화 앵커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 테러범을 이용하고, 보도국장은 시청률을 위해 윤 앵커를 이용하며, 테러범이 원하는 사과를 해줄 대통령은 아예 협상에 부정적이다. 오히려 테러를 일으킨 박노규가 가장 선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는 국가 행사를 위한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시켜 인부들을 죽게 만든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를 원한다. 또한, 테러를 저지를 때도 최대한 인명피해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그가 저지른 테러로 끝내 다리가 붕괴되고 사상자가 나오면서 의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지만 말이다.

이러한 대비에 더해 윤 앵커는 작품을 보는 관객들의 분노를 대통령과 기득권으로 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국민의 안전이 걸린 상황에서 왜 대통령이 ‘방송국에 와서 사과 한 마디를 하는’ 간단한 일을 하지 않아 일을 키우는지 답답해 한다. 원래 다급한 상황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고, 영화를 보면서 순간 대통령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의 감정이 들었다.

한계와 돌파구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스튜디오로 오지 말아야 할 이유도 존재한다. 먼저 대통령의 사과 한마디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는 테러범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며, 국가 원수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연막일 수도 있다. 또한, 관점에 따라 국가의 대테러 방침에 예외를 두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많은 국가들은 원칙적으로 테러 집단과의 협상을 하지 않는다. 한 번 성공했으니 테러를 더 시도할 수도 있고, 협상으로 받은 자금으로 새로운 테러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를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면 단순히 사회적 계급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목소리를 낼 힘이 없는 약자들과, 개인의 이익에 눈이 멀어 약자들을 무시하는 기득권들의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선악 구도를 단순화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상대적 강자였던 윤 앵커가 보도 국장이나 정부 인사들 앞에서는 상대적 약자로서 이용당하는 것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영리하게도, <더 테러 라이브>의 감독과 제작자들은 관객들이 이런 고민에 빠질 틈을 주지 않는다. 다리 붕괴 상황을 심화시켜 시간 제한을 걸고, 나중에는 스튜디오가 위치한 건물도 터뜨려 배경을 비스듬히 뒤집어 놓는다. 처절한 상황 속, 카메라는 드디어 마주한 윤 앵커와 테러범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내 주제의식에 방점을 찍는다. 들어주지 않는 약자의 목소리,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기득권. 이 장면이 있기에 마지막 윤 앵커의 선택과 결말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맺음말

돌고 돌아 선택과 집중이 빛나는 영화다. <더 테러 라이브>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제한을 이용해 속도감과 쾌감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정치 진영을 떠나 정치인들이 되새겨야 할 주제의식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전개를 위해 설정된 이분법적 선악 구도를 현실로 끌고 와 분노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여론에 불붙이는 것 또한 정치인들과 미디어에서 잘 하는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