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에 대해
저우수런은 1881년 중국 저장성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병환에 걸리며 가세가 기울었고, 전통 의학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 그는 서양 의학을 배우고자 했다. 이에 따라 스물셋의 나이에 1904년에 일본의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루쉰(Lu Xun)은 필명으로,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썼던 이름이다. 그는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미생물학 교수가 환등기로 틀어준 러일전쟁 필름을 보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본 영상 속의 중국인들은 러시아군의 첩자였던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공개처형 당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충격받은 루쉰은 몸을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의학이 아닌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병든 국민성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교편을 잡았고,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 직후에는 잠시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Q정전> 등의 작품을 통해 중국인들의 정신을 깨우고자 했다.
줄거리
<광인일기>는 액자식 구성의 소설이다. 이야기는 중등학교 때 친했던 지인 형제를 찾아간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형제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형 혼자 그를 반겨준다. 들어보니 동생은 지방에서 관직 발령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형은 웃으면서, 동생이 과거 정신병에 걸렸었으나 현재는 완쾌한 상태라며 당시 동생이 쓰던 일기장 두 권을 건네준다. 일기장 두 권의 제목은 <광인일기>로 동생이 회복 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의사는 동생의 일기를 읽고 피해망상병이라고 진단한다. 이후 글은 의사가 요약한 동생의 일기로 넘어간다.
일기의 화자는 “오늘 밤은 달빛이 무척 좋다”며 “삼십여 년이나 못 보았던 그를 오늘 보고 나니 정신이 유난히 맑아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야 지난 삼십여 년 내내 멍한 상태였음을 알겠다”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오늘 밤은 달빛이 전혀 없다. 심상치 않다”며 분위기가 불온하다고 느낀다. 달빛과 심상치 않은 상황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지만 화자는 광인답게 이 둘을 연결 짓는다.
그러면서 길거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해치고 싶어 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눈치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밤새워 고민하던 화자는 드디어 깨닫는다. 며칠 전 다른 마을의 소작인이 형을 찾아와 흉작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담력을 기를 수 있다는 미신을 이유로 흉악한 자를 때려잡고 그의 심장과 간을 기름에 지져 먹었다는 얘기도 함께 했었는데, 그날 소작인과 형이 화자를 보던 눈빛이 길거리의 사람들과 똑같았던 것이다.
화자는 결론을 내린다. 형과 마을 사람들이 식인을 하고 있고, 자신을 먹으려 한다고. 그들의 묘한 눈빛은 먹잇감을 보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화자는 과거에 여동생이 죽었을 때도 형이 그녀를 요리해 먹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리고 자신도 형이 요리한 여동생을 모르고 먹었을 것이며, 이제는 자신이 먹힐 차례라고 직감한다. 식인설을 믿게 된 화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식인을 해선 안된다고, 4천 년 간 이어져온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 말한다.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문장으로 일기는 끝난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설
일기 속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광인일기>는 엽기적인 호러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이 웃으며 화자의 일기장을 꺼냈기 때문에 우리는 유쾌하게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일기장 속 화자의 논리가 비약이 심하기 때문에 그가 정신적으로 몰려 있으며 왜곡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기의 내용은 정신병에 걸린 화자의 착각에서 비롯된 허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화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식인은 잘못된 것이라고 호소하는 장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화자가 내뱉은 “아이들을 구하자”는 말은 단순히 광인의 헛소리일 뿐일까?
누가 광인일까: 시선이 나누는 정상/비정상의 경계
루쉰은 ‘시선’을 통해 화자(광인)와 마을 사람들 간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눈다. <광인일기>에서 이 경계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삼십여 년만에 정신이 맑아진 인물’과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멍한 이들’을 나누고 있기도 하다. 어느 날 세상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깨달은 사람 A가 여전히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A는 사실 정상이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두려움이 어린 시선이 그를 향하게 될 것이다.
시작은 옆집 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전염병처럼 저잣거리의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퍼져나간다. 묘한 시선을 눈치챈 화자는 이를 계기로 타인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렇게 주변인들을 낯설게 보기 시작한 화자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주변 사람들은 사실 식인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아이들인가
‘식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된 화자는 사람들에게 식인을 하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본인의 말에 동의하는 무리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화자는 본인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같은 식인종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삼십여 년을 살아왔기에 이미 동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화자가 이를 인식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과거에 형제의 여동생이 죽었을 때, 1) 식인종인 형은 분명 식인을 했을 것이고, 2) 그 당시에 형이 집안의 살림을 맡았기에 3) 요리로 여동생이 나왔을 것이라는 비약을 거쳐 4) 본인 또한 식인을 경험한 식인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화자 입장에서 ‘나’ 또한 다른 나쁜 식인종들과 똑같기 때문에 오직 아직 식인을 해보지 않은 아이들만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식인이라는 키워드가 허무맹랑하기에 광인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뿐, 식인이라는 단어 대신 노예제도나 봉건제 같은 구시대의 관습을 넣는다면 화자의 이야기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과도기에 놓인 사람들
<광인일기>는 과도기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1911년부터 1915년 사이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통해 중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공화정이 새롭게 등장한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의식 수준이 황제가 통치하는 과거의 중국에 머물러 있었기에 (심지어 혁명 후 황제를 몰아낸 위안스카이도 스스로 황제 체제를 되살리고 그 자리에 즉위하고자 했다) 신해혁명은 결국 실패하였다. 광인 또한 삼십여 년 만에 정신이 맑아졌지만 시간이 흐르고 완쾌하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정신이 맑아졌을 때의 상태를 광인의 시기로 생각해 일기장을 <광인일기>라 명명했다.
사실 변화의 시기, 과거의 잔재를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결국 루쉰 또한 광인이 피해망상증에서 완쾌한 결말을 낸 것이 아닐까? 혼란스러운 시대 속 새로운 사회제도를 낯설어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는 과거의 악습을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절규하면서도 그 말을 다시금 광인의 것이라 규정하는 지식인의 모습에서 신해혁명의 편린을 맛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