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으로 불리는 희곡 중 하나이다. 고대 영국의 왕 리어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일이 틀어지면서 왕가의 핏줄이 끊기는 과정을 풀어냈다. 아서왕 이야기보다 오래된 전설을 기반으로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창작되었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교훈을 전달한다. 셰익스피어 강의에서 공부했던 내용과 제출했던 에세이를 바탕으로 분석글을 재구성해 보았다.
1. 줄거리
리어 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준 뒤 가장 아끼는 막내딸의 영토에서 말년을 보낼 심산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계승식에서 리어 왕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다. 장녀 고네릴과 차녀 리건은 아부를 하고 영토를 받아간다. 하지만, 언니들의 가식에 질린 막내 코델리아는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대답해버린다. 이에 분노한 리어 왕은 코델리아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겠다며 그녀를 추방한다. 또한, 리어를 말리는 켄트 백작 또한 충신이 아니라며 쫓아낸다. 다행히 코델리아는 여전히 그녀와 결혼하기 원하는 프랑스 왕과 함께 떠난다. 리어 왕은 장녀와 차녀의 영토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기로 한다.
시간이 흘러, 유산을 받은 고네릴과 리건은 리어 왕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그나마 켄트 백작이 변장을 하고 리어 곁으로 돌아오지만, 딸들이 그를 홀대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 결국 리어는 폭풍이 치는 허허벌판으로 내몰리고, 그가 데리고 다니던 100인의 기사단도 흩어져 버린다. 리어는 뒤늦게 왕권을 쉽게 포기하고 코델리아를 내친 것을 후회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글로스터 백작도 두 아들 (적자인 에드가와 사생아인 에드먼드)에게 권력을 계승하는 문제로 쓴맛을 보게 된다.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작위에서 배제되었던 에드먼드는 에드가에게 누명을 씌워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는다. 또한 글로스터 백작을 몰아내고 백작위를 차지할 기회를 엿본다. 마침 백작에게 프랑스 군의 힘으로 리어왕을 복권시키려 한다는 코델리아의 편지가 도착하고, 에드먼드는 고네릴과 리건에게 이를 밀고하여 글로스터 백작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분노한 콘월 공작 (리건의 남편)이 글로스터 백작의 눈을 뽑자, 이를 보다 못한 백작의 하인이 칼로 공작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렇게 리건의 남편 자리가 공석이 되고, 고네릴도 남편 올버니 공작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에드먼드는 두 왕족의 관심을 받는다. 그러면서 이제는 백작을 넘어 왕위에 대한 야망을 가지게 된다.
결말: 추방된 글로스터는 거지로 변장한 에드가와 만난다. 에드가는 그에게서 현재 상황을 듣게 된다. 이후 코델리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고네릴과 리건의 영국군과 전투해 패배한다. 에드먼드 백작도 용맹하게 싸워 승리하지만, 승리 직후 등장한 에드가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에드먼드를 두고 사랑의 연적이 된 왕녀들의 싸움은 고네릴이 리건을 독살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올버니 공작이 고네릴을 추궁하고 에드먼드도 죽으면서 고네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제 남은 왕족은 포로로 잡힌 리어와 코델리아 뿐. 하지만 코델리아는 에드먼드의 지시로 감옥에서 살해된 것이 드러나고, 이를 증언한 리어도 결국 눈을 감는다. 수습은 살아남은 올버니 공작과 에드가 백작의 몫이 된다.
2. 해석 (필자의 에세이에서)
2.1 권력 계승: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작품의 저변에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이 깔려있다. 그 중심에는 왕관을 내려놓은 리어의 지위에 대한 입장 차이가 놓여있다. 리어가 자신의 권력은 왕관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이해 못 하고 여전히 환상 속에 사는 한편, 고네릴과 에드먼드를 비롯한 젊은 세대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리어는 왕의 의무를 벗어던졌음에도 여전히 특혜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첫째 딸인 고네릴은 리어의 무책임한 태도에 염증을 느낀다. 특히, 그가 데리고 다니는 100인의 기사들이 그녀의 궁정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느낀다. (고네릴의 역할과 별개로 공감되는 부분이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리어를 대하는 태도 또한 불성실해진다.
고네릴은 결국 집사 오스왈드에게 “아버지에 대한 대우가 부실해져도 좋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 (1.3.8)고 얘기하기에 이른다. 리어는 대우가 달라졌음을 애써 부정하지만 이를 기사가 지적하자 결국 인정한다. “나 또한 최근 들어 고네릴의 집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와 서비스의 수준이 떨어짐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이 고네릴의 의도라기보다는 내 시기와 질투에 의한 착각이라고 생각해 왔다.” (1.4.66)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 오스왈드는 리어를 “선황”이 아닌 “내 주인님의 아버지” (1.4.66, 128)라 부르며 리어를 분노하게 한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인식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2.2 왜 기사단이 문제가 되었는가
스스로 영토와 권력을 딸들에게 물려준 리어에게 남은 힘은 기사단의 무력 뿐이다. 고네릴은 리어에게 이마저도 절반으로 줄이거나 성에서 떠나라고 요구한다. 단순히 유지비가 많이 들어 줄이라고 하는게 아닌 것이, 그녀의 입장에서 리어왕이 데리고 다니는 100인의 훈련된 기사들은 그를 거스르는 자들에게 휘두를 수 있는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어는 기사의 수를 줄이기를 거부하고, 둘은 앙금을 품고 헤어진다.
리어가 리건의 성으로 향했을 때, 리건은 한 술 더 떠 기사 50명이 아닌 25명만 수용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고네릴이 이미 소식을 전했고, 리어의 사병을 줄이자는 의견에 리건도 동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리건이 리어 본인이나 일행을 수용하지 않음을 알게 된 리어는 협상을 시도한다. 리어는 고네릴에게 “나는 너와 가겠다. 네가 제안한 50은 리건이 말한 25의 두 배이니 사랑도 두 배일 것이다.” (2.4.236)라 말한다. 하지만 이제 고네릴은 더 적은 수의 기사만 남기는 것을 원하고, 협상이 결렬된 리어는 분노에 휩싸인 채로 지붕 하나 없는 평야로 향한다.
2.3 리어의 광증: 거지 톰 등장, 광대 퇴장
3막은 폭풍우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리어의 내면을 반영한다. 폭풍우 속에서 평야를 방황하는 리어는 우울감에 허덕인다. 어느새 그를 따르던 기사들도 모두 떠나 버린 상황. 안타깝게도 80살인 리어의 정신은 버티지 못하고 꺾여버린다. 폭풍우를 맞으며 딸들에 대한 분노와 “벌거벗은 불쌍한 사람들 (과거 자신의 부족한 다스림 아래 집 없이 비를 맞았을 하층민들)” (3.4.39)에 대한 연민을 오가던 그의 정신은 망가진다.
비를 피해 평야의 오두막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리어는 완전히 이성을 잃는다. 이 장면에서 헛소리만 하는 ‘거지 톰’ (글로스터 백작의 적자 에드가가 누명을 피해 선택한 변장)의 등장과 현명한 궁정 광대의 퇴장이 교차되는 것은 리어의 미쳐가는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극 초반부터 리어 옆에서 현명한 조언을 건네었던 광대가 “그리고 나는 정오에 침대에 눕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극에서 사라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켄트와 글로스터 백작에 의해 폭풍우로부터 구조된 리어는 글로스터 백작의 성으로 옮겨지지만, 그곳에서도 환각을 본다. 환각에서 그를 따랐던 개들이 주인인 자신을 향해 짖는 장면을 보며 리어는 “그 작은 개들 트레이, 블란치, 그리고 스위트하트- 봐봐, 쟤들이 나를 보고 (불청객을 보듯) 짖네” (3.6.10)라고 말한다. 미쳐버렸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2.4 리어의 후회와 갱생
리어가 우울감에 허덕이게 되면서 비로소 하층민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리어는 왕좌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고통을 보지 못했고, 권력은 늙어서 현명해져야 하는 나이에도 그를 어린아이 같고 어리석게 만들었다. 글로스터가 자신의 아들 에드가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눈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처럼 리어 또한 폭풍우에 노출된 후에야 비로소 왕관에 달린 책임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자연 덕분에 그는 겸손해지고 독자에게 더 호감을 살만한 인물로 변화한다. 폭풍우 속 오두막을 발견했을 때, 그는 비를 맞고 떠는 광대에게 오두막에 먼저 들어가라고 재촉하며 “먼저 들어가, 이 집도 없이 가난한 녀석아. 먼저 들어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글로스터 백작처럼 그 또한 권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늙은이일 뿐이었고, 그렇기에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갱생’은 리어가 본인이 처한 현실을 수용하는 단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이다.
그가 받아들여야 하는 다른 것들은 막내딸 코델리아의 죽음, 고네릴과 리건의 독살 (둘은 에드먼드를 두고 다툰다), 그리고 정쟁과 전쟁에 휩싸인 고대 영국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는 리어와 같은 늙은이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고 그 또한 죽는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그의 노년을 같이 보내고자 했던 코델리아가 죽은 모습을 가리키며 “너희는 이게 보이느냐? 그녀를 봐! 그녀의 입술을 봐. 저기를 봐, 저기를 봐” (5.3.294)이다. 마지막 순간, 그의 딸이 살아서 숨 쉬는 듯한 환각을 본 듯하다.
이처럼 <리어왕>은 힘에 취해 늙어간 권력자의 비극적인 끝을 얘기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 비극의 정서를 더욱 강조한다.
맺음말
은퇴 시기가 오면 인생은 변한다. 리어왕이 과거에 다른 이들의 울타리였다면, 왕관을 내려놓은 이후부터는 다른 이들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자존심이 강한 리어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장녀와 차녀의 성에서 쫓겨나고 집 없이 방황하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실을 수용하게 된다.
만약 그가 이 미래를 알았다면, 그는 왕으로서도, 그리고 부모로서도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백성들에 대한 책무를 다했을 것이고, 왕이기 이전에 훌륭한 아버지로서 딸들을 대하려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왕관이 부여한 아우라가 리어라는 사람 자체에서 나온다는 착각만 하지 않았더라면 딸들이 그를 그리 쉽게 외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권력 앞에 무색한 부모-자식 관계, 뒤늦은 후회, 그리고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이가 모두 죽는 비극적인 결말까지. 셰익스피어는 신중하지 못한 왕위 계승으로 왕가가 몰락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리어왕>은 왕관의 권력은 평생 가지 않으며, 권력에 취해 본연의 인격과 품위를 잃거나 인간관계에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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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리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리어왕>을 살펴보았지만,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작품을 정리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을 정리해 보았다.
- 코델리아를 단순히 착하다고, 고네릴과 리건을 단순히 악하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 에드먼드는 사생아라는 주어진 지위에 만족하지 않는 현대적인 인물상을 지녔다. 악역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인 그를 중심으로 극을 살펴보자.
- ‘충신’ 켄트는 과연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일까?
- 프랑스 왕이 코델리아와 결혼한 이유가 과연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가진 왕가의 핏줄이 주는 정당성을 명분으로 영국을 차지하려는 계략이었을지도 모른다.